브랜드의 시대

원문 · Paul Graham — The Brand Age

한국어 전문 번역 · Jang. Inspiration

2026년 3월

1970년대 초, 스위스 시계 산업에 재앙이 닥쳤다. 지금은 이를 쿼츠 위기라고 부른다. 하지만 사실은 서로 다른 세 가지 재앙이 거의 동시에 겹친 일이었다.

첫 번째는 일본과의 경쟁이었다. 스위스는 1960년대 내내 백미러로 뒤따라오는 일본을 지켜봤다. 일본은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1968년 제네바 천문대의 정확도 경연에서 일본이 기계식 시계 부문의 최상위 순위를 모조리 차지하자 스위스는 놀랐다.

스위스는 무엇이 다가오는지 알고 있었다. 일본은 수년 전부터 더 저렴한 시계를 만들 수 있었다. 이제는 더 좋은 시계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스위스 시계의 가격은 훨씬 비싸질 참이었다. 1945년부터 세계 대부분 통화의 환율을 고정해온 브레턴우즈 체제는 스위스 프랑의 가치를 인위적으로 낮은 수준인 0.228달러로 유지하고 있었다. 1973년 이 체제가 무너지자 프랑의 가치가 치솟았다. 1978년에는 0.625달러에 이르렀다. 미국인이 스위스 시계를 사려면 이제 2.7배의 돈을 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1]

쿼츠 무브먼트가 없었더라도 스위스 시계 산업은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해외 경쟁은 거세졌고, 환율이라는 보호막도 사라졌으니까. 하지만 결정타는 쿼츠 무브먼트였다. 그들이 이기려고 애써온 게임 자체가 이제 의미를 잃었다. 한때는 비싼 값을 치러야 했던 것. 정확한 시간을 아는 일이 이제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된 것이다.

1970년대 초부터 1980년대 초까지 스위스 시계의 판매 수량은 거의 3분의 2나 줄었다. 대부분의 스위스 시계 회사는 빚을 갚을 수 없는 상태가 되거나 그 직전까지 몰렸고, 결국 팔려나갔다. 하지만 전부는 아니었다. 소수는 독립 회사로 살아남았다. 정밀기기를 만드는 회사에서 럭셔리 브랜드로 바뀌는 방식으로.

그 과정에서 기계식 시계의 성격도 달라졌다. 가장 비싼 시계는 언제나 비쌌지만, 비싼 이유와 구매자가 그 대가로 얻는 것은 완전히 바뀌었다. 1960년의 고가 시계는 제조 비용이 많이 들어서 비쌌다. 구매자가 얻는 것은 그 크기 안에서 만들 수 있는 가장 정확한 시간 측정 장치였다. 지금 시계가 비싼 이유는 브랜드가 광고에 많은 돈을 쓰고, 여러 수단으로 공급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구매자가 얻는 것은 값비싼 지위의 상징이다.

그런데 이 사업도 돈이 됐다. 스위스 시계 산업은 아마 기술을 계속 팔았을 때보다 브랜드를 팔면서 더 많은 돈을 벌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매출 그래프는 판매 수량 그래프와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매출은 절벽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한동안 정체되다가, 살아남은 회사들이 새로운 운명을 받아들인 1980년대 후반에 로켓처럼 솟아오른다.

시계 회사들이 새 게임의 규칙을 알아내는 데는 약 20년이 걸렸다. 그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흥미로운 이유가 있다. 워낙 완전히 달라졌기에, 우리 시대의 가장 강력한 힘 중 하나인 브랜드를 이해하기에 더없이 좋은 사례가 되기 때문이다.

브랜드는 제품 사이의 실질적인 차이가 사라졌을 때 남는 것이다. 그런데 기술은 자연스럽게 그 차이를 없애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러니 스위스 시계 산업에서 일어난 일은 그저 흥미로운 예외가 아니다. 우리 시대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다.

예거 르쿨트르의 웹사이트는 현재 판매하는 컬렉션 하나가 “시계 제작의 황금기에 나온 고전적인 디자인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한다. 이 말에는 오늘날 시계 회사들이 모두 알면서도 좀처럼 대놓고 말하지 않는 사실이 담겨 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이든, 황금기는 아니라는 것.

황금기는 1945년부터 1970년까지였다. 시계 산업이 전쟁의 혼란에서 벗어나 스위스가 정상에 선 때부터, 1960년대 말 세 가지 재앙이 닥치기 시작할 때까지다. 당시 시계 제작자들이 무엇보다 추구한 것은 두 가지였다. 얇음과 정확성. 사실 시계 제작의 핵심은 이 둘 사이의 균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시계는 시간을 알기 위해 몸에 지니는 물건이다. 그러니 더 좋게 만드는 근본적인 방법도 두 가지다. 더 쉽게 지닐 수 있게 만들거나, 시간을 더 정확하게 알려주게 만드는 것.

정확성이 가치 있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황금기에는 오히려 얇음이 더 가치 있었다. 회중시계 시대에도 최고의 제작자들은 시계를 가능한 한 얇게 만들려 했다. 저렴하고 두꺼운 회중시계는 “순무”라는 조롱을 받았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중 남성들의 시계가 손목으로 옮겨가면서 얇음은 더욱 시급한 과제가 되었다. 그리고 얇게 만드는 것이 정확하게 만드는 것보다 어려웠기에, 황금기의 더 비싼 시계를 구별해주는 특성은 대체로 얇음이었다.

어떤 시대에는 시계 제작자들이 또 다른 것을 추구하기도 했다. 보통의 방식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것 이상의 기능이다. 예컨대 달의 위상을 알려주거나 소리로 시간을 알려주는 식이다. 업계에서는 이런 기능을 “컴플리케이션”이라고 부른다. 19세기에 인기가 있었고 지금도 다시 인기를 얻고 있지만, 실용적인 기능 하나인 날짜 표시를 제외하면 황금기에는 부수적인 볼거리에 불과했다. 어느 황금기나 그렇듯, 황금기의 최고 제작자들은 본질적인 트레이드오프에 집중했다. 그리고 모든 황금기가 그렇듯, 이를 아름답게 해냈다. 황금기의 가장 뛰어난 시계에는 그 이후 누구도 따라잡지 못한 고요한 완벽함이 있다. 곧 설명할 이유 때문에, 아마 앞으로도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황금기에 가장 명성 높았던 세 브랜드는 파텍 필립, 바쉐론 콘스탄틴, 오데마 피게라는 이른바 “성삼위일체”였다. 그 명성은 대체로 정당했다. 탁월한 작업의 품질로 얻어낸 명성이었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이들은 명성과 성능이라는 두 다리로 서 있었다. 그리고 이후 20년 동안 배운 것은 첫 번째 다리에 모든 체중을 실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시계 제작자들이 역사적으로 추구해온 두 가지 중 어느 쪽에서도 더는 이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쿼츠 무브먼트는 어떤 기계식 무브먼트보다 정확했을 뿐 아니라 더 얇기도 했다.

그래도 성삼위일체에게는 몸을 지탱할 다른 다리가 있었다. 다른 유명 스위스 시계 회사 대부분이 판매하던 것은 오직 성능뿐이었다. 그 회사들 중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남은 곳은 하나도 없었다.

오메가는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보여주었다. 오메가는 스위스 시계 회사들의 기술 덕후였다.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시계를 만들었지만, 럭셔리 브랜드가 된다는 생각에는 좋게 봐줘도 마음이 복잡했을 것이다. 일본이 정확한 무브먼트를 만드는 데 스위스만큼 능숙해지자 오메가는 오메가답게 대응했다. 더 정확한 무브먼트를 만드는 것. 1968년에는 진동수가 45% 더 높은 새 무브먼트를 내놓았다. 이론적으로는 더 정확해져야 했지만, 새 무브먼트는 너무 취약했다. 믿고 쓸 수 있다는 오메가의 평판까지 무너뜨렸다. 더 좋은 쿼츠 무브먼트도 만들려 했지만, 그 길 끝에는 끝없는 가격 하락 경쟁밖에 없었다. 1981년에 이들은 빚을 갚을 수 없는 상태에 빠졌고 채권단에 인수되었다.

파텍 필립은 정반대의 접근법을 택했다. 오메가가 무브먼트를 다시 설계하는 동안 파텍은 케이스를 다시 설계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케이스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는 직접 설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당시 스위스 시계 산업이 얼마나 기묘했는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형태의 자본주의였다. 당시에도 스위스 같은 나라에서나 가능했을 방식이다. 작고 전문화된 회사들이 규제로 각자의 자리를 정한 채 연결된 네트워크였다. 우리가 편의상 시계 회사라고 부르는 기업은 그중 소비자와 맞닿은 부분에 불과했다. 성삼위일체는 케이스를 직접 설계하지 않았고, 무브먼트조차 대부분 직접 설계하지 않았다.

1968년, 또 그해다. 파텍 필립은 케이스 디자인의 무게중심을 바꾼 새 시계를 출시했다. 이번에는 직접 만든 디자인을 케이스 제작자들에게 가져가서 “우리를 위해 만들 것은 이것”이라고 말했다. 그 결과는 골든 엘립스라는 인상적인 새 모델이었다. 다소 헷갈리는 이름이었다. 타원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새 케이스는 UI 디자이너들이 둥근 직사각형이라고 부를 만한 형태, 즉 모서리가 둥근 직사각형에 가까웠다. 이 새로운 시계 제품군은 꽤 성공했다.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미래의 본보기가 된 것이다. [2]

독특한 케이스 하나를 설계한 일이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 시계 전체가 브랜드를 드러내는 물건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찬 시계의 브랜드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고 싶은 사람의 관점에서 보면, 황금기의 가장 뛰어난 시계에는 문제가 있었다. 누구도 그 시계가 어느 브랜드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 몇 인치 거리까지 다가가기 전에는 최고 회사들의 시계가 전부 똑같아 보였다. 미니멀리즘이란 그런 것이다. 답이 하나로 모이는 경향이 있다. 게다가 황금기의 시계는 오늘날 기준으로 작았다. 시계 제작자들은 수백 년 동안 시계를 더 작게 만들려고 노력했고, 1960년쯤에는 대단히 능숙해져 있었다. 그래서 최고 브랜드 사이를 구별해주는 유일한 것은 다이얼에 인쇄된 이름이었는데, 다이얼 자체가 작으니 이름도 아주 작았다. 황금기 성삼위일체 시계에 쓰인 제조사 이름의 글자 높이는 0.5~0.75밀리미터였다. 파텍은 케이스를 장악하면서 브랜드의 면적을 8제곱밀리미터에서 800제곱밀리미터로 늘렸다.

100년 동안 속삭이던 브랜드를 왜 갑자기 소리치게 만들었을까? 성능으로는 일본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브랜드에 더 기대야 했다.

이렇게 하는 데는 대가가 따른다. 케이스 자체를 브랜드로 만든 이 초기 사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골든 엘립스는 보기 흉하지 않다. 디자이너들이 모든 것을 둥근 직사각형으로 바꾸던 1970년대에는 한층 더 멋져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골든 엘립스는 케이스 디자인이 진화한 다음 단계는 아니었다. 모든 시계가 둥근 직사각형이 되지는 않았다. 시계 제작자들은 회전하며 원을 그리는 물건을 담는 케이스의 최적 형태를 이미 찾아낸 상태였다.

크라운도 마찬가지다. 태엽을 감을 때 돌리는, 시계 옆의 작은 손잡이. 이것도 이미 가장 쓰기 좋은 형태를 찾아낸 상태였다. 그런데 파텍은 엘립스 특유의 윤곽을 살리려고 크라운을 너무 작게 만들었다. 그 결과 태엽을 감는 일이 영 불편해졌다. [3]

이 초기 사례부터 브랜드와 디자인이 부딪히는 지점이 보인다. 브랜딩과 좋은 디자인은 그냥 별개의 일이 아니다. 향하는 방향이 서로 다르다. 브랜딩은 본질적으로 남과 달라야 한다. 반면 좋은 디자인은 수학이나 과학처럼 올바른 답을 찾아간다. 그렇게 답을 찾다 보면, 결국 서로 비슷해지는 경우가 많다.

브랜딩은 바깥으로 갈라지는 쪽으로, 디자인은 하나의 답으로 모이는 쪽으로 향한다.

물론 여지는 있다. 디자인에는 수학만큼 뚜렷하게 정해진 정답이 없다. 특히 사람을 위한 디자인은 그렇다. 그러니 진심에서 나온 독특한 시도가 꼭 나쁜 디자인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력을 피할 수 없듯, 브랜딩과 디자인 사이의 근본적인 충돌도 피할 수는 없다.

실제로 브랜딩과 디자인의 충돌은 너무도 근본적이어서 우리가 디자인이라 부르는 것들을 한참 넘어선다. 종교에서도 이를 볼 수 있다. 어떤 종교의 신자들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관습을 갖게 하고 싶다면, 편리하거나 합리적인 일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신자들을 남들과 구별하고 싶다면 불편하고 비합리적인 일을 하게 만들어야 한다.

자신의 디자인을 남들과 구별하고 싶을 때도 똑같다. 좋은 선택지를 고르면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고를 것이다.

브랜딩과 좋은 디자인을 결합하는 방법은 두 가지뿐이다. 하나는 가능성의 공간이 엄청나게 넓은 경우다. 예를 들어 회화가 그렇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뛰어난 그림을 그리면서도, 동시에 분명히 자기만의 화풍으로 그릴 수 있었다. 벨리니나 레오나르도만큼 뛰어난 화가가 100만 명 있었다면 더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열 명 정도에 가까웠으니 서로 부딪칠 일이 별로 없었다. [4]

또 하나는 가능한 디자인이 아직 많이 탐색되지 않은 경우다. 새로운 영역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면 올바른 답을 찾으면서 동시에 그것을 자신만의 것으로 내세울 수 있다. 적어도 처음에는 그렇다. 정말 올바른 답을 찾았다면 다른 사람들의 디자인도 결국 그 답으로 모일 것이고, 시간이 흐르며 브랜드의 우위는 약해질 것이다.

시계 디자인은 아직 탐색되지 않은 영역도 아니고, 가능한 선택지가 엄청나게 넓지도 않다. 그러니 브랜드를 드러내려면 좋은 디자인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 지금의 시계 제작 시대를 한 문장으로 설명한다면, 이 말이 꽤 잘 맞을 것이다.

파텍 필립은 눈에 띄게 브랜드를 드러낸 시계를 만드는 전략이 통할지 확신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유일한 전략조차 아니었다. 그들은 길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매출을 기준으로 보면, 실제로 통했던 전략은 이것이었다.

이 전략이 통하려면 고객들도 어느 정도 호응해야 했다. 파텍은 모두가 정확성과 얇음 같은 성능 때문에 시계를 사는 것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적어도 일부는 비싸서 산다는 것도 알았다. 다만 그런 고객이 얼마나 되는지, 어디까지 밀어붙일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을 부추기기 위해 파텍은 성삼위일체 중 누구도 이전에는 많이 하지 않았던 일을 했다. 브랜드 광고였다. 그리고 광고에서 이야기한 것은 자신들의 시계가 얼마나 비싼가였다. 1968년의 파텍 광고는 엘립스에 “한 달 수입의 절반 정도를 투자하는 것이 왜 현명한 선택인지” 설명했다. 광고는 이렇게 이어졌다. “모든 파텍 필립과 마찬가지로, 이 얇은 모델은 전부 수작업으로 마감됩니다. 파텍 필립은 제작 비용이 가장 많이 드는 시계이므로 생산량은 엄격히 제한됩니다. 전 세계의 저명한 보석상에 보내기 위해 하루에 출고 승인을 받는 시계는 단 43개뿐입니다.” [5]

아직 얇음을 언급한다는 점에서 초기 광고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정확성에 관한 언급은 없다. 아마 파텍은 그 싸움에서는 이미 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음은 오데마 피게였다. 1970년 이들은 유명 디자이너 제랄드 젠타에게 자신들만의 상징적인 시계를 디자인해달라고 의뢰했다. 대담하게도 소재는 스틸이었다. 그 결과가 1972년에 출시된 로열 오크다. 이들 역시 브랜드 광고를 시작했고, 높은 가격을 더욱 극적으로 강조했다. 한 광고는 “금의 가격으로 선보이는 스틸”이라는 말로 시작했다. “지금 보고 계신 것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스테인리스 스틸 시계, 오데마 피게 ‘로열 오크’입니다. 이를 금보다 더 귀하게 만드는 것은, 점점 사라져가는 장인 시계 제작자들이 이 시계를 만드는 데 들인 시간입니다.” 광고 아래쪽에서는 전통적인 표현을 뒤집어 자신들의 시계 가격을 “35,000달러부터 그 아래까지”라고 소개했다.

로열 오크는 브랜드에 할애한 표면적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골든 엘립스는 시계의 얼굴을 브랜드의 표현으로 바꿨지만, 스트랩과 브레이슬릿은 평범한 것을 사용했다. 로열 오크에서는 시계의 얼굴이 금속 브레이슬릿과 하나로 연결되어, 디자인이 손목 전체를 둘러싸며 이어졌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스테인리스 스틸 시계”라고 말할 때, 표면의 모든 제곱밀리미터가 그 말을 하고 있었다.

고객들은 이 새로운 접근을 받아들일까? 초기 결과는 어느 정도 희망적이었다. 성삼위일체의 매출이 급증하지는 않았지만, 0으로 떨어지지도 않았다. 적어도 새로운 메시지에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계속하다 보면 그 수가 늘어날지도 몰랐다.

그래서 계속했다. 로열 오크의 성공에 고무된 파텍 필립은 1974년 제랄드 젠타에게 비슷한 시계를 디자인해달라고 의뢰했다. 로열 오크의 디자인은 배의 현창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러니 이 새 시계의 디자인도… 배의 현창에서 영감을 얻을 예정이었다. 이름은 노틸러스였고, 1976년 바젤 시계 박람회에서 출시되었다.

노틸러스에서는 브랜딩과 디자인이 양립하기 어렵다는 사실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거대했다. 황금기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가장 비싼 남성용 시계의 지름은 보통 32~33밀리미터였다. 노틸러스는 42밀리미터였다. 크기만 큰 것도 아니었다. 시계 얼굴 양옆에 귀 한 쌍 같은 불필요한 돌출부도 있었다. 하지만 방 건너편에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파텍이 지금 만드는 시계 중 가장 인기 있는 것은 노틸러스다. 오늘날 구매자들이 원하는 것과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요컨대 가능한 한 크게 브랜드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1976년에는 시대를 앞서갔다. 그때는 아직 조금 과했다.

마침내 파텍의 운명을 바꾼 시계는 또 다른 상징적인 디자인, 홉네일 칼라트라바였다. 홉네일 칼라트라바는 작은 피라미드 모양 돌기로 장식되어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것만으로도 독특하게 보이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 돌기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황금기의 드레스 워치였다.

홉네일 칼라트라바는 파텍 필립의 광고 대행사를 이끌던 르네 비텔의 아이디어였던 듯하다. 새로운 디자인은 아니었다. 여러 시계 회사가 오랫동안 케이스를 홉네일로 장식해왔고, 파텍에도 1968년부터 그런 모델이 있었다. 하지만 1984년 비텔은 파텍의 사장 필리프 스턴에게 사실상 이런 말을 했다. 이것을 표준 디자인으로 삼으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이 디자인과 당신들의 브랜드가 하나로 연결되게 하는 광고 캠페인을 만들겠다고. [6]

결과는 눈부신 성공이었다. 그렇게 탄생한 3919는 1980~1990년대 뉴욕의 투자은행가들에게 크게 인기를 얻어 “은행가의 시계”로 알려져 있다. 이때까지 파텍은 쿼츠 시계도 만들며 양쪽에 걸쳐 있었고, 광고에서는 화려한 케이스에 넣은 쿼츠 시계도 기계식 시계만큼이나 많은 수고가 들어간다고 방어적으로 주장했다. 하지만 투자은행가들은 기계식 시계에 관한 이야기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자동으로 태엽이 감기는 기계식 시계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3919는 수동으로 태엽을 감는 시계였다. 그래도 좋았다. 파텍은 쿼츠 무브먼트 이야기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1970년대 초부터 정체되어 있던 매출은 1987년이면 분명한 상승세에 올라 있었다.

결정적인 요인이 비텔의 광고 실력이었는지, 그 이야기를 받아들일 사람들이었는지는 확실히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 투자은행가들을 알았던 사람으로서 나는 후자 쪽에 무게를 두고 싶다. 이들은 “여피”라는 말이 만들어진 대상이었다. 돈을 많이 쓰는 생활로 잘 알려진 사람들이었다. 부를 드러내는 새로운 방식을 받아들일 누군가가 있다면 바로 이들이었을 것이다. 반면 비텔이 같은 메시지를 10년 전에 보냈다면 들어줄 사람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유가 무엇이든 1980년대 후반에는 무언가가 일어났다. 바로 그때 모든 수치가 마침내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1985년쯤까지는 기계식 시계가 어떻게 될지 여전히 불분명했다. 1990년에는 분명해졌다. 비싸고 브랜드를 강하게 드러내며, 대놓고 기계식임을 보여주는 시계를 지위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관습이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이다. [7]

시대에 뒤처진 기술이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 되는 일은 흔하지 않다. 왜 기계식 시계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손목시계가 그 목적에 딱 맞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보이는 손목보다 좋은 자리가 있을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드러내느냐다. 다이아몬드 반지나 금목걸이를 할 수도 있겠지만, 투자은행가들에게는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이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야만적이었을지는 몰라도 마피아는 아니었다. 반면 금시계만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물건도 없었다. 회사의 회장도 쿼츠 시계가 생기기 전인 20년 전에 아내가 선물한 시계를 여전히 차고 있었다. 부를 드러내야 한다는 압박이 점점 커져 어딘가로 나오게 된다면, 바로 여기였을 것이다. [8]

적어도 남성에게는 그랬다. 여성들은 기계식 시계를 찬다는 생각에 크게 끌리지 않았다. 부유한 여성 대부분은 쿼츠 무브먼트를 넣은 까르띠에 탱크로 만족한다. 왜 차이가 날까? 일부는 증기기관 구매자 대부분이 남성인 것과 같은 이유다. 하지만 주된 이유는 비싼 기계식 시계가 이제 남성에게 사실상의 장신구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여성에게는 사실상의 장신구가 필요 없다. 진짜 장신구를 착용할 수 있으니까.

다만 기계식 시계가 충분히 정확하다는 점은 중요했다. 새 3919의 오차는 하루 5초를 넘지 않았을 것이다. 쿼츠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가장 저렴한 대중용 쿼츠 시계도 하루 오차가 0.5초였고, 가장 뛰어난 것은 1년에 3초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정도까지 정확할 필요가 없었다. 하루 1분씩 틀렸다면 시간을 알려주는 도구에서 부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넘어갈 수 없었을 것이다. 늘 시간이 틀리는 시계를 고급스럽다고 보기는 어려웠을 테니까. 하지만 하루 5초면 충분했다. [9]

브랜드와 품질의 관계에서 중요한 지점이다. 사람들이 브랜드 때문에 사는 제품이 됐다고 해서 품질이 중요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역할이 달라진다. 품질은 넘어야 할 문턱이 된다. 더는 품질만으로 제품이 팔릴 만큼 뛰어날 필요는 없다. 제품은 브랜드가 팔아준다. 하지만 브랜드의 평판을 유지할 만큼은 좋아야 한다. 브랜드가 내세운 모습에서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시계 회사들로서는 여피가 때맞춰 나타나 구해준 것이 행운이었다. 어쩌면 꼭 행운만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여피가 보여준 시장의 변화는 더욱 거세게 이어졌고, 시계 회사들도 어쩔 수 없이 끌려갔다. 홍콩과 두바이의 구매자들을 위해 크고 번쩍이는 시계를 만들지 않으면 다른 누군가가 만들 것이다. 그래서 지금 자신들도 그런 시계를 만들고 있다. 브랜딩과 디자인 사이의 작고 미묘한 충돌 몇 가지로 시작한 일이, 이제는 디자인을 상대로 한 전면전이 되었다.

현재 기계식 시계 제작의 시대에는 아직 이름이 없다. 하지만 이름이 필요하다면 무엇이어야 할지는 분명하다. 브랜드의 시대다. 황금기는 1945년부터 1970년까지였고, 그 뒤 1970년부터 1985년까지 쿼츠 위기가 이어졌다. 1985년부터 우리는 브랜드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이 유일한 브랜드의 시대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최초도 아니다. 순수미술은 1930년대에 바의 정전이 확립된 이후 이미 자체적인 브랜드의 시대를 살아왔다. 앞으로 이런 일을 더 자주 보게 될 것 같으니, 브랜드의 시대가 어떤 모습인지 시간을 들여 살펴볼 가치가 있다.

지금은 황금기와 무엇이 다를까? 황금기에 살던 사람을 타임머신으로 데려온다면 무엇이 눈에 들어올지, 상상해보는 것이 가장 좋은 답일지도 모른다.

그가 고급 쇼핑 거리를 걷는다면 가장 먼저 알아차릴 것은 황금기의 유명 시계 회사들이 모두 그 어느 때보다 잘나가는 듯 보인다는 점일 것이다. 여전히 모두 존재할 뿐 아니라, 예전처럼 보석상에게 제품 판매를 맡기는 대신 대부분 자기만의 부티크를 갖고 있다.

사실은 착시다. 1970~1980년대의 암흑기를 독립 회사로 버텨낸 곳은 파텍 필립, 오데마 피게, 롤렉스 세 곳뿐이다. 나머지는 모두 여섯 지주회사가 소유하고 있다. 기계식 시계가 남성용 고급 액세서리로 다시 살아남을 수 있다는 점이 분명해지자, 이 지주회사들은 브랜드들을 다시 키워냈다. 이제 이들은 별개의 회사라기보다 미국의 3대 자동차 회사에 합쳐진 브랜드들과 비슷하다. 모회사가 시장의 서로 다른 고객층에 접근하는 수단이다. 예를 들어 론진은 더 이상 오메가와 경쟁하지 않는다. 두 브랜드를 함께 소유한 회사가 론진에 더 낮은 가격대의 시장을 맡겼기 때문이다. [10]

바쉐론 콘스탄틴 부티크가 IWC와 예거 르쿨트르의 부티크, 나아가 몽블랑과 까르띠에의 부티크와도 그렇게 비슷하게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모두 같은 회사 소유다. 의류 브랜드도 비슷하다. 도시의 가장 고급스러운 쇼핑 거리를 걷다 보면 수많은 서로 다른 브랜드의 매장처럼 보이는 것들이 실은 소수 대기업의 소유다. 이런 거리가 그토록 생기 없어 보이는 이유 중 하나다. 단일 개발업자가 만든 교외 주거지처럼, 다양성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부족하다.

시간 여행자가 이 매장들의 쇼윈도를 들여다보면 가장 먼저 알아차릴 것은 모든 시계가 얼마나 큰가일 것이다. 황금기에도, 사실 그전 수백 년 동안에도, 크다는 것은 싸다는 뜻이었으므로 그는 놀랄 것이다. 황금기의 비싼 남성용 시계는 지름 33밀리미터, 두께 8밀리미터 정도였을 것이다. 오늘날 비싼 시계는 지름 42밀리미터, 두께 10밀리미터에 가깝다. 부피로 보면 두 배가 넘는다. 분명히 매우 고급스러운 매장의 쇼윈도에 싸구려처럼 보이는 시계들이 진열되어 있다니, 그는 경악할 것이다. [11]

우리는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안다. 시계가 시간을 알려주는 물건에서 브랜드를 알려주는 물건으로 바뀌자, 그 일을 더 잘하기 위해 커졌다. 크기뿐 아니라 형태도 바뀌었다. 시간 여행자가 알아차릴 또 다른 점이다. 브랜딩의 원심적 경향에 따라 생겨난 기묘한 케이스 형태와 어색한 돌출부가 놀랄 만큼 다양하다. 그는 저 파네라이 시계들의 크라운에 달린 거대한 보호 장치가 대체 무엇인지 궁금해할 것이다. 사람들이 이 시계를 차고 무엇을 하기에 크라운을 그렇게 보호해야 하는가? 왜 크라운 보호 장치에는 등록 상표라는 문구까지 새겨져 있는가? 우리에게는 무슨 일인지 분명하다. 하지만 형태가 기능을 따르던 황금기에서 온 사람에게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상상해보라. [12]

이 이상하고 큼직한 시계들을 보며 어리둥절해하던 그는 또 하나의 패턴을 발견할 것이다. 놀랄 만큼 많은 시계가 자신도 이미 알고 있던 어느 큼직한 시계 브랜드를 닮았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롤렉스를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롤렉스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해 별로 바꿀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황금기에도 이미 브랜드의 시대에 한쪽 발을 담그고 있었다. 초기에는 시계를 개선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1950년대 말에 제네바와 뇌샤텔의 경연 참가를 중단했고”, 1960년쯤부터는 “기계식 시계 제작에 관한 연구를 대부분 포기했다.” [13] 게을러져서가 아니었다. 시계를 지위의 상징으로 마케팅하면 매출을 더 빨리 늘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60년대에는 여기에 집중했다. 10년 뒤 쿼츠 위기가 닥쳤을 때 롤렉스의 고객은 이미 시계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누가 봐도 롤렉스이기만 하면 되는 사람들로 자연스럽게 추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점에서는 다른 시계 회사들보다 한참 앞서 있었다. 1970~1980년대에 파텍 필립과 오데마 피게가 만들려고 애썼던 것을 롤렉스는 이미 1940년대에 갖고 있었다. 제조사의 브랜드를 즉시 드러내는 케이스다. 롤렉스 특유의 외형은 자연스럽게 발전한 듯하지만, 일단 그런 모습이 생기자 회사는 그 중요성을 깨달았다. 실제로 이를 시계의 특징 중 하나로 홍보했다. 1960년대의 롤렉스 광고는 이렇게 말한다. “통금 덩어리에서 깎아낸 고전적인 형태를 회의 테이블 반대편에서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사실 롤렉스는 두 가지 면에서 시대를 앞서갔다. 케이스는 알아보기 쉬울 뿐 아니라 컸다. 적어도 황금기 기준으로는 그랬다. 다만 영리한 마케팅의 결과는 아니었다. 창업자 한스 빌스도르프가 방수 시계를 만드는 데 집착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그것이 롤렉스 오이스터의 존재 이유였다. 오이스터 같은 시계는 지프처럼 튼튼하게 설계되었다. 황금기 시계 디자인에는 두 극이 있었다. 한쪽에는 두껍고 튼튼하며 대개 스틸로 만든 도구용 시계가 있었다. 다른 쪽에는 얇고 우아하며 대개 금으로 만든 드레스 워치가 있었다. 하지만 롤렉스는 그 사이의 경계를 흐렸다. 두껍고 튼튼한 시계를 만들 때 스틸뿐 아니라 금으로도 만들었다. 결과는 일종의 럭셔리 지프였다. 이 표현을 듣고 떠오르는 것이 없다면 잠깐 생각해보라. 지금 모두가 몰고 다니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SUV란 럭셔리 지프다. 시계에서 일어난 일이 자동차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 실제로 시간 여행자가 고개를 돌렸다가 포르쉐 카이엔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차린다면, 방금 본 시계들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포르쉐 911을 떠올리게 하도록 만든 거대한 유사 오프로드 차량이니까. [14]

시간 여행자가 파텍 필립 부티크에 들어가 실제로 노틸러스를 사려 한다면 가장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팔아주지 않을 테니까. 여기서는 브랜드의 시대가 낳은 가장 극단적인 현상을 만나게 된다. 인위적 희소성. 노틸러스는 그냥 살 수 없다. 여러 등급의 다른 모델을 차례로 사면서 수년간 충성심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 다음 대기 명단에서 또 수년을 기다려야 한다. [15]

물론 이 전략은 더 많은 시계를 팔게 해준다. 하지만 희소한 시계가 중고 시장에 나오지 않게 함으로써 소매 가격을 받쳐주는 역할도 한다. 인위적 희소성으로 판매를 촉진하는 회사는 희소한 모델이 너무 많이 중고 시장에 흘러나오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 그러면 더 이상 희소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상황은 시계판 탄소 격리다. 구매자들이 죽을 때까지 시계를 간직하는 것이다.

시장을 이런 이상적인 상태로 밀어가기 위해 파텍은 판매 전후 양쪽에서 압박한다. 희소한 모델에 이르는 경로를 시간과 돈 모두에서 너무 비싸게, 너무 불편하고 불합리하게 만들어서 진정한 팬만 견딜 수 있게 함으로써 되팔이들을 걸러낸다. 파텍은 하위 등급 시계의 공급은 제한하지 않으므로 이들은 중고 시장에서 소매 가격보다 싸게 팔린다. 따라서 되팔이를 노리는 사람은 이익을 내며 팔 수 있는 모델을 얻기 전에 수년 동안 손해 보는 구매를 반복해야 한다. 그런데도 이 시스템을 뚫는 사람들이 있는 듯하다. 그래서 파텍의 대응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누가 시계를 파는지 알아내려고 중고 거래를 예의주시한다. 경매 매물에는 보통 일련번호가 있으므로 추적하기 쉽다. 필요하다면 중고 시장에서 자기 시계를 다시 사들여 일련번호를 확인하고 유출 경로를 추적하기도 한다. 해마다 수백 개를 사들인다. 그리고 팔아서는 안 되는 시계를 파는 사람을 적발하면 그 고객과의 거래만 끊는 것이 아니다. 어떤 소매점의 고객들이 그런 유출을 너무 많이 일으키면 소매점 전체와의 거래를 끊는다. 자연히 소매점도 구매자 감시에 적극 협조하게 된다.

물론 중고 시장으로 흘러나오는 시계는 언제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충성스러운 고객도 일정 비율로는 죽는다. 사실 파텍에게는 중고 시장이 계속 존재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들이 마주한 가장 중요한 질문, 최상위 등급 시계의 공급을 얼마나 빠르게 늘릴 것인가에 관한 가장 가치 있는 정보원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 모델들의 희소성이 다른 모든 모델의 구매를 촉진하므로, 중고 시장에 나온 최상위 모델은 언제나 소매 가격보다 비싸게 팔려야 한다. 파텍은 공급을 늘릴 때 오류에 대비해 큰 여유를 두고 있을 것이다. 중고 가격이 소매 가격에 가까워지면 가격 붕괴에 다가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이제 이 시계들을 투자 대상으로 사는 만큼, 그런 붕괴는 자산 거품이 터질 때와 똑같이 파괴적인 연쇄 효과를 낳을 것이다. 단순히 자산 거품의 붕괴와 비슷한 것이 아니다. 그 자체가 자산 거품의 붕괴다. 이제 최고급 시계 회사가 하는 일은 바로 이것이다. 지속되는 자산 거품을 세심하게 관리하는 것. [16]

이는 내가 ‘콤오버 효과’라고 부르는 현상의 한 사례다. 대머리를 가리려 옆머리를 넘기는 것처럼, 하나하나는 작은 변화가 쌓여 조금 어긋난 상태에서 기괴하게 잘못된 상태로 변해가는 것이다. 파텍이 이 전체 계획을 한 번에 짜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분명 조금씩 발전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얼마나 이상한 곳에 도착했는지 보라. 황금기에 파텍 필립을 사는 방법은 보석상에 가서 돈을 주는 것이었다. 지금 파텍은 자산 거품을 유지하려고 구매자를 단속한다.

브랜드의 시대에서 내가 가장 강하게 느끼는 것은 그 기묘함 자체다. 독립 회사처럼 보이고 자체 매장까지 있지만 사실은 소수 지주회사가 모두 소유한 좀비 시계 브랜드들. 시계를 더 작게 만들어온 500년의 진보를 거꾸로 돌리는 거대하고 어색한 형태의 시계들. 말을 듣지 않는 고객을 잡기 위해 회사가 중고 시장에서 자기 시계를 다시 사들여야 하는 사업 모델. ‘말을 듣지 않는 고객’이라는 개념 자체. 모두 너무 이상하다. 그리고 이상한 이유는 형태가 따라야 할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황금기가 끝날 때까지 기계식 시계는 필요한 물건이었다. 시간을 알기 위해 필요했다. 그 제약이 시계와 시계 산업 모두에 의미 있는 형태를 만들어주었다. 황금기에도 이상하게 생긴 시계는 분명 있었다. 모두가 아름답고 미니멀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당시 제작자들은 그런 시계를 만들 때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틀에 갇히지 않으려고 일부러 실험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브랜드의 시대 시계가 이상하게 보이는 이유는 다르다. 실용적인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기능은 브랜드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도 분명 제약이긴 하지만, 좋은 것을 만들어내는 명확한 제약은 아니다. 브랜드가 만드는 제약은 결국 인간 심리의 가장 나쁜 몇 가지 특성에 기대고 있다. 그러니 오직 브랜드로만 이루어진 세상은 이상하고 나쁜 세상이 될 것이다.

이야기가 꽤 어두워졌다. 이 잔해 속에서 건질 만한 교훈은 없을까?

분명한 교훈 하나는 브랜드와 거리를 두라는 것이다. 사는 것뿐 아니라 파는 것도 피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돈을 벌 수는 있다. 보기보다 어려울 것 같기는 하지만. 다만 사람들의 브랜드 욕구를 자극하는 것은 붙잡고 풀 만한 좋은 문제가 아니다. 좋은 문제 없이 좋은 일을 하기는 어렵다.

조금 더 미묘한 교훈도 있다. 분야마다 개인의 힘으로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스러운 리듬이 있다는 것. 황금기도 있고, 그렇지 않은 시기도 있다. 그리고 올라가는 중인 분야에 있을 때 좋은 일을 해낼 가능성이 훨씬 높다.

물론 황금기가 한창일 때는 아무도 그것을 황금기라고 부르지 않는다. “황금기”는 그 시대가 끝난 뒤 붙이는 이름이다. 그렇다고 황금기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당시의 상황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자신들이 얼마나 좋은 상황에 있는지 모른다. 행운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대체로 실수지만, 이 경우는 아니다. 당시 황금기의 느낌은 그저 이렇다. 똑똑한 사람들이 흥미로운 문제에 매달려 열심히 일하고, 성과를 얻는 것. 그 이상을 목표로 최적화하려 들면 과적합이 될 것이다.

사실 브랜드 같은 것에 매달리지 않게 해주면서, 황금기도 자연스럽게 찾아주는 원칙이 하나 있다. 문제를 따라가라.

황금기를 찾으려면 황금기 자체를 찾아다녀서는 안 된다. 흥미로운 문제를 따라가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그 안에 있던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황금기를 찾았다. 똑똑하고 야심이 있으며 스스로에게 정직하다면, 어떤 문제에 끌리는지에 대한 자신의 감각보다 더 좋은 안내자는 없다. 흥미로운 문제가 있는 곳으로 가라. 그러면 다른 똑똑하고 야심 있는 사람들도 그곳에 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함께 해낸 일을 돌아보며, 그때를 황금기라고 부를 것이다.

각주

[1] 브레턴우즈 체제는 통화 사이의 환율을 직접 고정한 것이 아니다. 각 통화의 가치를 금에 대해 고정했다. 당연히 그 결과 통화 사이의 환율도 고정되었다.

[2] 골든 엘립스는 옆면이 완전히 곧지 않아 정확히 둥근 직사각형은 아니다. 1960년대 초 피에트 하인이 널리 알린 슈퍼타원과 형태가 비슷하다. 이름도 거기서 따왔을 수 있다. 하지만 수학적으로 실제 슈퍼타원은 아니다. 내 추측으로는 파텍의 디자이너가 마음에 드는 형태가 나올 때까지 운형자로 이것저것 시도했을 것이다. 그래도 형태 자체는 좋다.

[3] 하필 파텍 필립이 이런 실수를 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현대적인 크라운을 발명한 사람이 아드리앙 필립이었으니까. 그래도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는 깨달았던 듯하다. 이후의 엘립스에는 오히려 지나치게 눈에 띄는 크라운이 달려 있다.

[4] 순수미술에서 작업자 수에 비해 디자인 공간이 넓다는 점은, 작품의 작가를 판별하는 일의 실무적 중요성과 결합하면서, 레오나르도다운 독특한 방식으로 그리는 것이 레오나르도의 뛰어남을 만든다는 인상을 주었다. 큐레이터, 미술사학자, 미술상들이 마주하는 가장 위험한 문제, 즉 틀렸을 때 가장 나쁜 결과를 낳는 문제는 작품이 누구의 것인지 판별하는 것이다. 그러니 한 작가의 작품을 다른 작가의 작품과 구별해주는 특징에 많은 시간을 들여 생각하고 이야기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그런 특징이 작가를 뛰어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레오나르도의 드로잉에서 여성의 뺨을 그린 선이 뛰어난 이유는 뺨의 선으로서 얼마나 잘 그려졌는가이지, 다른 작가들이 그린 선과 얼마나 다르게 보이는가가 아니다.

회화는 그토록 높은 권위를 지니기에, 잘 그리는 것보다 독특한 스타일을 지니는 것이 위대한 예술가의 결정적 특성이라는 신화가 인접 분야의 수많은 나쁜 디자인에 명분을 제공해왔다. 제품을 구별하려고 흉측한 것을 만드는 브랜드도 “모든 위대한 예술 작품처럼, 우리 제품에도 독특한 스타일이 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고, 사람들은 그 말을 받아들인다.

[5] 파텍 필립이 1970년 미국에서 내보낸 광고는 금 브레이슬릿을 단 파텍 3548을 “1,700달러짜리 신탁기금”이라고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좋은 투자였을까? 최상의 경우, 한 번도 착용하지 않았고 원래 상자와 서류까지 갖춘 시계라면 지금 딜러가 2만 달러 정도를 줄 수 있다. 수익률로는 연 4.5% 정도로, 절대적으로 형편없는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같은 기간 S&P 500 주식의 평균 수익률은, 배당금에 세금을 낸 뒤 전부 재투자했다면 10%에 더 가까웠던 듯하다. 시계로 만들지 않은 금덩어리만 샀어도 평균 수익률은 9%를 넘었을 것이다. 그러니 예상대로 그 광고는 그리 좋은 투자 조언이 아니었다.

[6] 1990년대 파텍 필립의 미국 마케팅을 이끌었던 타니아 에드워즈는 비텔이 정말로 종이 위에 3919의 디자인을 스케치했다고 말했다. 내게는 좀 이상하게 들린다. 3919는 기존 3520에 서브 세컨즈, 즉 6시 방향 위에 초침이 있는 작은 다이얼을 더한 것과 정확히 같았기 때문이다. 기존 시계를 가리키며 “저것에 서브 세컨즈를 더하면 됩니다”라고 하면 되는데, 왜 거의 같은 디자인을 다시 스케치했을까? 다만 이 이야기로 알 수 있는 것은, 파텍 내부 사람들이 3919의 디자인을 광고 대행사의 공으로 얼마나 크게 생각했는가다.

[7] 기계식 시계의 전환점을 정확히 정해야 한다면 나는 1986년이라고 하겠다. 스위스 시계의 판매 수량은 1985년에 반등했지만 매출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니 여기서 보이는 것은 저렴한 쿼츠 스와치의 판매 붐이다. 실제로 그렇게 많은 스와치를 팔았는데도 매출이 정체되었다면 기계식 시계의 판매는 줄었을 것이다. 반면 1986년에는 판매 수량이 조금만 늘었는데도 매출이 급격히 상승한다. 그만큼 비싼 기계식 시계의 판매가 늘었다는 뜻이다.

[8] 물론 기계식 시계를 좋아하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다. 오래된 기술에 관심이 있어서다. 정말로 기계식 시계에 관심이 있다면 좋은 소식이 있다. 하나 갖기 위해 손목에 광고판을 차거나 큰돈을 쓸 필요는 없다. 황금기의 시계를 사면 된다. 여전히 시간을 잘 맞추고, 훨씬 아름다우며, 가격도 새 시계의 일부에 불과하다.

황금기 시계를 살 때 핵심은 좋은 딜러를 찾는 것이다. 좋은 딜러를 알아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계에 대해 얼마나 많이 알려주는지를 보는 것이다. 나쁜 딜러는 브랜드의 명성과 케이스의 날렵한 선에 관한 공허한 말만 늘어놓는다. 좋은 딜러는 시계와 무브먼트의 모델 번호를 알려주고, 뒷면을 연 사진을 포함해 사진을 많이 제공하며, 치수를 알려주고, 손상과 복원 내역을 모두 공개하고, 시계가 정확히 어느 정도의 오차로 작동하는지 말해준다. 좋은 딜러는 대체로 스스로도 시계 덕후여서 이런 것들에 관심이 많다.

(지금도 좋은 기계식 시계를 진지하게 만들려는 독립 제작자들이 소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을 보면, 흐름이 자신에게 불리할 때 좋은 일을 해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다.)

[9] 이상하게도 3919가 수동 태엽식이라는 점이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다. 시계가 충분히 오래 작동하면 하루 5초의 오차도 쌓이기 시작한다. 하루 5초씩 빨라지는 시계는 3개월 뒤 7분이나 앞서게 된다. 하지만 수동 태엽식 시계는 가끔 태엽 감는 것을 잊으면 멈춘다. 다시 태엽을 감을 때 시간도 다시 맞추게 되는데, 평균적으로 실제 시간보다 약 30초 늦게 맞추게 된다. 그러니 2주에 한 번쯤 3919의 태엽을 감는 일을 잊었다면, 시계가 틀린 시간을 보여주는 일은 드물었을 것이다.

[10] 아직 다시 살아나기를 기다리는 브랜드가 하나 있다. 유니버설 제네브다. 황금기의 주요 업체 중 하나였지만, 1977년 이후에는 인수자에서 인수자로 넘어가는 브랜드 이름에 가까웠다. 올해 하반기에 부활할 예정인데, 틀림없이 오랜 시계 제작 전통에 관한 이야기를 들고 나올 것이다.

[11] 더 정확히 말하면 정확성에 비해 크기가 큰 것이 싸다는 뜻이었다. 더 큰 무브먼트가 시간을 정확하게 맞추도록 만드는 것은 더 쉽다. 하지만 정확성이 같은 두 시계라면 보통 더 큰 쪽이 더 저렴했다.

[12] 한때는 그 형태가 기능을 따랐다. 원래 다이빙용 시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용도로는 이미 오래전에 시대에 뒤처졌다. 오늘날의 다이빙용 시계는 다이브 컴퓨터라고 불리며, 디지털 방식으로 시간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알려준다.

[13] 롤렉스는 1950년대에는 연평균 16.6개의 특허를 받았지만, 1960년대에는 연평균 1.7개에 불과했다.

피에르이브 동제, 지위의 상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롤렉스의 경영사(The Making of a Status Symbol: A Business History of Rolex), 맨체스터 대학교 출판부, 2025.

[14] 롤렉스와 SUV에는 더 구체적인 공통점도 있었다. 동경의 대상인 남성성이었다. 롤렉스의 광고 대행사 J. 월터 톰슨이 작성한 1967년 내부 보고서는 전달하려는 생각을 이렇게 설명했다. “롤렉스는 아무리 거칠고 위험하고 영웅적이거나 고귀한 상황이라도, 어떤 상황에서든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착용한 남성이 잠재적으로 영웅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앞서 인용한 동제의 책에 재수록.

[15] 이 사업 모델은 구매 결정이 주로 브랜드에 의해 움직일 때만 작동한다. 정상적인 시장에서는 어떤 제조사가 생산을 제한하면, 고객들은 그만큼 좋은 것을 제공하는 경쟁 제조사에게서 사면 된다. 고객들이 일정 수준의 성능이 아니라 특정 브랜드를 찾을 때만, 그 브랜드를 얻기 어렵게 만들어 사람들을 조종할 수 있다.

[16] 물론 거품을 발견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질문은 이것이다. 터질까? 보통의 거품이 결국 터지는 이유는 투기자들이 지나치게 낙관적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파텍 필립의 CEO가 “통화 공급량”을 통제하므로 과열된 시장을 식힐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그러니 이들의 특정한 거품을 터뜨릴 원인은 아마 두 가지뿐일 것이다. 후임자가 그만큼 유능하지 않거나, 기계식 시계를 착용하는 관습 자체가 사라지는 경우다. 후자가 더 큰 위험으로 보인다. 사람들은 손목에 세 가지 물건을 차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손목에 착용하는 인기 기기가 두 종류만 생겨도 다음 세대의 젊은 부자들은 기계식 시계를 나이 든 사람들의 물건으로 보기 시작할 수 있다. 럭셔리 시계 브랜드가 그런 상황에서 살아남기는 상상하기 어렵다.

이 글의 초고를 읽어준 샘 올트먼, 빌 클레리코, 대니얼 개클, 루이스 가르시아, 골다머의 여러 분, 제시카 리빙스턴, 벤 밀러, 로버트 모리스, 존 리어든, 다시 라이스, 알렉스 타바록, 개리 탠에게 감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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