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가쁘게 달려왔던 한 해가 끝났다. VARCO Texture 제품 개발을 중심으로, 학부를 마쳤고 처음으로 Siggraph, CVPR 같은 학회에 논문도 투고해봤다. 인턴으로 시작했던 NC에서의 생활은 어느덧 한 팀의 팀장으로 이어질 예정이다. 나름 알찬 한해였다고 볼 수 있겠다. 다만, 연말이 다가오자 번아웃이 찾아왔다. 이유는 아무래도 내가 주도하여 개발한 제품이 기대한만큼의 반응을 이끌어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단 1명의 고객이라도 실제 업무에 도입하여 효용을 느끼길 바랬으나, 그러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실제 24년 메인 목표는 사내 기준 100명이었다. 형편없는 예측력이다). 새로운 기술이나 서비스를 데일리 업무에 도입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란 것은 안다. 그렇다면 번아웃의 원인은 아마도 기대관리에 실패한 탓이겠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목표였던만큼, 실망감도 컸던 것 같다. 적절한 수준의 목표 설정과 기대를 잘 관리하는 것, 그리고 중간중간 적절하게 휴식해주며 번아웃이 오지 않도록 페이스 조절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How는 조금 더 생각해보기로 하고..
칭찬해주고 싶은 점은, 올 한해 휘몰아치는 회사의 상황/이슈들에도 팀을 잘 리드해서 중심잡고 끌고 왔다는 점. 하나의 AI 제품을 나름대로 잘 패키징하여 시장에 선보였다는 점 등이있다. 사내에서 공식적으로 1차 FGT (Focus Group Test)를 완료했고, 공식적으로 팀장을 맡길 수 있는 신뢰를 얻었다. 25년도에 한번 더 주도적으로 서비스를 기획하고 런칭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어낸 것이다. AI Product를 이정도 호흡으로 연구하고, 안정적으로 서빙하는 팀을 운영하는 것에는 나름의 노하우가 생긴 듯하다. 제품의 성공은 그다음 문제이니까. 팀 그 자체도 하나의 제품이라는 점도 배웠다. 올해를 함께한 팀은 충분히 훌륭했다. 팀이 유지되지 못했다는 점은 아쉽지만 다시 팀을 잘 빌딩해서, 몇번 더 시도해보면, 괜찮은 제품 만들 수 있는 것 아닐까. 아직 2번 밖에 안해봤다. 3번은 해봐야하지 않겠나. (3번 해도 안되면, 4번 하겠지만.)
부족했던 점을 회고해 본다면, 텍스쳐링(Texturing)을 돕는 AI를 개발하면서 사실 텍스쳐링 업무에 대해서는 깊이 알지 못했다는 점이 있겠다. 아티스트들이 어떤 툴을 사용하는지, 어떤 단계를 거쳐 텍스쳐링을 하는지, 어떤 점에서 불편을 겪고 있는지 등 필수적인 이해가 결여된 채로 기능을 기획하고 제품을 개발했다. 여러 아티스트들(3D 모델러, 컨셉원화가 등)을 만나 인터뷰도 정성껏 했고, 여러 버전을 개발하고 런칭해보면서 텍스처링이나 모델링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가 많이 높아지기도 했다. 그러나, 내가 당사자가 아닌 상황에서 깊이 있는 공감의 수준까지는 도달할 수 없었다. 텍스쳐링 분야는 서브스턴스 3D 페인터(이하 섭페)를 통해 이미 한번 크게 기술적 도약을 이루어낸 상태였다. 3D 모델러 중 대다수는 컨셉 구상만 잘 해두면 웬만한 표현은 섭페를 통해 빠르게 고품질로 구현 가능하다고 판단한다. 즉, 텍스쳐링 업무 자체에 있어 문제의식 혹은 불편함을 별로 느끼지 않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일부 Legacy 라이브 게임에서는 포토샵을 주력으로 활용하고 있고, 기존 텍스쳐를 다른 스타일로 베리에이션 하는 노가다성 업무에 대해 니즈를 드러내기도 했으나 기능을 한두번 써보고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했다. 생성 AI 활용시 디테일한 표현 제어는 포기해야 한다는 점에서, 인게임에 바로 투입가능한 퀄리티를 원하는 전문 아티스트 타겟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배웠다.
3D 모델링/텍스쳐링에 대한 나의 이해도가 높았고, 게임 아트 작업 프로세스에 대한 깊은 공감을 기반으로 도출한 최종적인 결론 역시 “AI 기반 생성은 아직 인게임용 아트 작업에 활용하기에 퀄리티 부족 문제가 있다”였을 가능성이 높다(실제 a16z games의 서베이 결과도 비슷한 결론이다). 그렇다면 결국 AI 연구를 더해서 퀄리티를 높이는 방법 밖에는 없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 설령, 그게 정답이라고 하더라도 글로벌에서 가장 경쟁력있는 3D 파운데이션 모델을 확보한다는 전략은 무모하다고 생각한다. 가능한 인력/자원도 없고, 학계와 빅테크, 스타트업 나눌 것 없이 정말 피튀기는 경쟁이 펼쳐지고 있다. 학계와 대기업 중심의 3D 파운데이션 모델 전투가 한 축, Meshy / Tripo3d / Rodin 등 서비스 쪽에서의 전투가 한 축. 어떻게든 새롭게 등장하는 주력 오픈소스 연구(Trellis 라던지)를 레버리지하는 편이 나을 것이고, 기술이 아닌 영역에서 차별화 전략을 세워야 할 것 같다. 대표적으로는 고유한 게임 IP 3D 데이터 기반 학습 모델 제공, 특정 사용자 그룹을 Lock-In 하는 UI/UX 확보, 특정 게임 유저 타겟의 3D 생성 API 제공(크래프톤 인조이의 3D 프린터 등) 등이 있을 수 있겠다. 이러한 차별화 요소에 대해서는 여러 가설들을 빠르게 실험해보며, 지속적인 고민이 필요하겠다.
생성 AI 기술이 통하는 타겟 그룹은 전문가 혹은 비전문가 등과 같이 심플하게 정의되기 어렵다. 그보다는 AI에 대해 열정적인 관심이 있고, A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는 그룹, “AI 얼리어답터 그룹 / AI Enthusiasts(매니아) 그룹”과 같은 새로운 정의가 필요하고, 이들을 한 군데로 모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국내 탑클래스 아티스트들 위주의 개발 프로세스가 돌아가는 NC 사내에만 한정될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시장으로 가능하면 글로벌 시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VARCO Texture와 비슷한 포맷의 제품(텍스쳐 생성/수정 AI)으로 잘되고 있는 케이스의 경우 StableProjectorZ 정도가 있는데, 1인 개발자인 Igor Aherne가 유튜브와 디스코드 채널을 기반으로 커뮤니티를 구축해가고 있다. 퀄리티적인 측면이나 사용성 측면에서 우리의 제품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타겟 사용자 설정 및 마케팅 측면에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해당 커뮤니티에는 전문가/비전문가가 모두 섞여있으며, 우리가 문제라고 생각했던 퀄리티 측면의 아쉬움이 커뮤니티에 형성된 특별한 유대감/기대감 등 정성적 요인으로 해소가 되는 듯한 모습이 보인다. 25년도에는 이러한 전략들 (다양한 타겟 대상 실험, 커뮤니티 운영 등)을 조금 더 공격적으로 실행해 볼 수 있으면 어떨까하는 바램이 있다.
바라건데, 25년도에는 가벼워질 수 있다면 좋겠다. 과정을 즐길 수 있다면 좋겠다. 진심으로(Sincerely) 임하되, 너무 진지해지지(Seriously) 않았으면 좋겠다. 동기가 충만한 사람들과 훌륭한 제품을 만드는 일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이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 그 과정이 유한 게임이 아닌 무한 게임임을 깨닫고 체화할 수 있으면 좋겠다. 연말이 되어 소진되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충만한 상태가 되어있기를 바란다. 25년도 화이팅이다.